중국의 역사(下) –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청나라까지

안녕하세요.

사주명리의 첫걸음, 초코서당
에디터 초명입니다.

하상주 시대부터 한나라까지의 중국사를 정리한 지난 상편에 이어,
오늘은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청나라까지의 역사를 정리해보려 합니다.

지난 상편에 대한 글은 아래 링크를 통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한나라 멸망 후부터 수나라 통일까지 약 300년간 중국이 위, 진, 동진, 남조, 북조로 분열되었던 혼란기를 말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시작해 남북이 대립하며 문화와 민족 이동이 활발했던 시기로, 중국 역사상 두 번째 대분열기에 해당하죠.

중국 역사를 공부할 때 가장 재미없다고 여겨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아래 내용들은, 그냥 가볍게 훑어만 주세요.

지난 시간에 진나라 최고 권력자 사마소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사마염이 실권자가 되었다 말씀드렸습니다. 사마염은 조씨 황제를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본인이 황제에 등극한 후, 위나라를 아예 진(晉)나라로 바꿔버립니다.

진나라는 중국을 통일했지만, 사실 그 넓은 땅덩어리를 다스릴 만한 능력이 되지 않았습니다. 넓은 땅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사마씨 정권은 봉건제를 도입하여 자신의 친인척들이 지방을 통치하게 했는데요. 결국 진나라 초대 황제의 아들, 조카 8명이 서로 권력 투쟁에 들어가면서 내전이 발생합니다.

서기 291년부터 306년까지 중국 진나라에서 8명의 사마씨왕이 싸운 사건을 ‘8왕의 난‘이라 합니다.

영가의 난, 오호십육국 시대

8명의 사마씨들이 참 바보같은 게, 권력에 눈이 멀어 북방의 흉노족, 선비족 같은 오랑캐들까지 끌어들여 용병으로 썼어요. 만리장성 때문에 전쟁을 걸지 못했던 유목 민족들이 중원으로 이사하게 된 후, 진나라 황제와 진나라 병사 10만명을 몰살시킵니다.

중국 한족들은 이걸 ‘영가의 난‘이라 해서 굉장히 치욕적으로 생각합니다. 당시 진나라 황제는 회제라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의 연호가 영가라서 영가의 난이라 부르는 거랍니다.

흉노가 용병으로 들어왔다가 중원에서 자리잡는 걸 본 다른 유목 민족들도 너도나도 중원으로 밀려 들어옵니다. 흉노를 포함하여 총 5개의 오랑캐 유목 민족들이 16개의 고만고만한 나라를 세웁니다. 이 시기가 중국 역사를 공부할 때 가장 지루한 오호십육국 시대입니다. 135년동안 16개의 나라가 세워졌다 사라졌으니 지루할 만도 하죠.

사마씨의 진나라는 망한 게 아니라, 중국 북부 지역을 오랑캐에게 빼앗긴 후 지금의 상해, 남경 부근으로 도망을 갑니다. 서기 317년에 일어난 일인데요. 이렇게 반토막난 진나라 시대를 동진시대라고 합니다.

원래 진나라의 수도는 북쪽의 낙양이었는데, 남쪽으로 도왕 와 새로 문을 연 수도는 지금의 남경입니다. 지도를 보면 낙영은 중국 대륙의 서쪽(정확하게 서북쪽), 그리고 남경은 동쪽에 있거든요. 그래서 동쪽에 있는 남경을 수도로 한 진나라다, 라는 뜻에서 동진이라 부르는 겁니다.

불교의 전파

이 시기에 중국 북부에 자리 잡은 오랑캐 국가들 때문에 불교가 중국에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유목 민족들이 중국을 점령하고, 유목 민족의 왕을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대리인으로 내세워 통치 철학으로 활용했죠.

그리고 불교의 윤회사상을 내세워, 중국의 한족들이 지금 고생하는 건, 다 전생의 업보라고 세뇌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불교가 국가적 차원의 종식 종교가 되어갔죠. 게다가 중국의 민중들은 당시 온나라가 다 전쟁통이니 속세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서, 불교를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불교는 그 이전에 들어오긴 했는데, 제대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이 오호십육국 시기입니다. 공식 기록은 서기 372년, 중국 북부의 16개 오랑캐 나라 중 하나였던 전진을 통해 고구려로 불교가 들어온 거구요.

남북조 시대

북부 중국에 오랑캐들이 총 16개의 나라를 세우고 망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 중 선비라는 유목 민족이 세운 북위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선비족이 439년 북부 중구의 나머지 오랑캐 국가들을 다 멸망시키고 하나의 나라로 통일하는데요. 중국 전체가 아니라 북부 중국의 통일입니다. 이 북위가 중국 북부를 통일한 시기를 북조北朝시기라고 부릅니다.

북조가 있으면 남조도 있겠죠? 진나라가 나라 반쪽을 날려먹고 남쪽으로 도망와서 동진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했는데요. 남쪽 지방에도 원래 원주민들이 잘 살고 있었는데 북쪽에서 우르르 몰려온 유목민들이 같이 살자고 하니 갈등이 있었겠죠. 기득권 세력과 북쪽에서 내려온 유목민들 사이에 갈등, 내부분열로 동진도 서기 420년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동진이 망한 후 중국 남부에는 송, 제, 양, 진 4개의 나라가 차례로 세워졌다 망하는데요. 이렇게 동진이 망한 후 남부 중국에 들어선 4개의 나라의 시대를 합쳐서 남조시대라고 부릅니다.

북쪽의 북조와 남쪽의 남조를 합쳐서 남북조 시대라고 하는 거구요.

중국 역사에서 조조가 세운 위나라, 사마염이 세운 진나라, 지금의 남북조를 하나로 묶어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하는 거랍니다. 이게 중국 역사를 공부할 때 제일 재미없는 시대라 가장 학생들이 책을 많이 손에서 놓는다고 하네요.

효문제, 왕희지, 도연명

북쪽을 통일한 선비족의 나라 북위의 황제 효문제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유목민족의 황제였지만 중국의 오리지널 문화를 너무나 사랑했거든요. 북이의 수도도 지금까지 중국 역사의 중심지인 낙양으로 옮긴 황제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급진적인 한족화를 추친했다 보니 귀족들의 반발로 효문제 사망 이후 북위는 무너지게 됩니다. 허무주의와 낭만주의가 팽배한 이 시기에 예술이 크게 발달했는데, 이 시기의 예술을 대표하는 사람이 중국 서예의 아버지라 불리는 왕희지와, 귀거래사를 쓴 시인 도연명입니다.

중국 북쪽의 5개 오랑캐가 16개의 나라를 만들어 개판을 쳤던 오호십육국 시대를 거치며 북조란 시대가 시작됐고, 중국 남쪽에서는 사마씨의 진나라가 동진이란 나라를 세우고, 그 동진이 또 망하면서 4개의 나라가 연속으로 세워지고 망하는 남조의 시대가 시작됐다 말씀드렸습니다.

420년 시작된 중국의 남북 분열시대, 남북조 시대는 서기 589년 수문제(양견)가 세운 수나라에 의해 또 다시 통일이 됩니다. 수문제는 중국이 두 나라로 분열되어 있으면 백성만 고생이다, 란 생각으로 중국 남쪽, 즉 남조(송, 제, 양, 진)의 마지막 국가인 진을 공격하여 서기 589년에 멸망시킵니다. 거의 150년만에 중국이 하나로 통일된 것이죠.

수문제는 중국에서 진시황과 거의 동급의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양견이 중국을 통일하지 않았다면, 지금 중국이 여러 나라로 쪼개졌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수문제는 국가가 시험을 실시해서 그 시험을 통과한 사람을 국가가 임명해서 지방으로 발령하는 과거제도를 도입합니다. 그리고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며 백성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죠. 이때 중국 전체 인구가 처음으로 5,000만 명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수양제(수나라 멸망의 원인)

수문제의 아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 고구려 역사에도 등장하는 수나라 2대 황제 수양제입니다. 수양제는 자기 아버지 수문제를 죽이고, 경쟁자인 큰 형 양용도 죽이고 서기 604년에 본인이 직접 황제 자리에 오른 인물입니다.

아버지와 달리 10년만에 수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어 10년만에 멸망시킨 중국 최악의 황제로 알려져있죠.

수양제는 황제가 되자마자 중국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합니다. 수문제는 백성들이 고생할 것 같다고 백지화한 프로젝트를 강하게 밀어붙이죠. 중국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총 길이 2,500킬로미터의 어마어마한 규모의 운하였는데요.

고구려 정벌(Feat: 살수대첩)

백성들이 힘들어하는 와중에, 수양제는 고구려를 정벌하러 나섰다가 결정적으로 나라를 말아먹게 됩니다. 당시 중국이 오호십육국, 남북조 등으로 서로 치고받고 할 때,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국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국력을 키우고 있었잖아요. 수나라의 눈에 자신과 국경을 맞댄 고구려가 눈에 들어왔을 텐데요. 11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하러 떠났다가, 을지문덕 장군에게 몰살당하죠.

바로 잘 알려진 살수대첩입니다. 당시 살아서 돌아간 수나라 병사는 채 2,000명도 안 되었다고 하네요.

사실 이건 1차 고구려 정벌이었구요. 서기 614년에 고구려로 2차 정벌을 떠나려는데, 백성들이 끌려가면 죽는다고 저항을 하기 시작해요. 국내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수양제는 수도에서 남부 중국으로 도망칩니다. 그러다 경호실장의 칼에 맞아 죽었다고 하네요. 서기 618년의 일이랍니다.

수양제가 수도를 버리고 도망을 갔을 때, 많은 귀족들이 권력을 잡고자 합니다. 이때 황제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외치던 이연이란 사람이 있었어요. 중국 낙양 북쪽에 위치한 태원이란 동네 행정 책임자였는데요.

수나라가 개판이 되니, 북방의 유목 민족들도 중국 중원을 치려고 했겠죠? 국경을 넘으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도시가 바로 태원이었는데요. 이연은 오랑캐와 싸우다가 많은 병사를 잃습니다. 근데 수양제가 이연에게 상을 줘도 모자랄 판에, 벌을 주려고 해요. 충신인 이연은 또 벌을 받으러 황제를 찾아가려 하구요.

이연의 아들 이세민이 아버지를 말리고 설득하여 수나라에 반기를 들게 됩니다. 그리고 수나라 수도에 들어간 이연은 수양제의 손자를 잠깐 황제 자리에 앉혔다가, 황제 자리를 이양받는 형식으로 황제 자리에 올라요.

그리고 나라 이름을 수나라에서 당나라로 개명했으니, 이게 서기 618년의 일이랍니다.

이세민, 고구려 원정, 안시성

당나라 황제 이연은 큰 아들 이건성을 태자로 임명합니다. 둘째인 이세민은 이를 못 마땅히 여겼겠죠? 본인이 아버지를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킨 후, 수나라를 직접적으로 멸망시킨 일등 공신이었으니까요. 이연은 결국 형을 죽입니다. 겁에 질린 이연은 어쩔 수 없이 이세민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줍니다. 서기 626년 이세민이 당태종이 된 순간이었죠. (적어놓고 보니 조선의 역사 속 태종 이방원이 벌인 사건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네요.)

그런데 이세민이 대단한 게,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신하들을 죽이지 않고 모두 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위징이란 신하가 이세민에게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 호통을 친 적이 있었는데 이를 벌하지 않고 요직에 앉혀 자기 사람으로 만들죠.

당태종 이세민은 무리한 토목공사를 전부 금지하고, 백성을 위해 황실 재산까지 털어서 세금을 깎아줍니다. 백성들에게 당태종은 성군으로 추앙받게 되죠.

당나라에 굴하지 않는 나라가 있었으니, 그 이름이 바로 고구려입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망했는데요. 당태종은 정벌이 가능하다 믿고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그런데 당나라가 한 곳에서 발이 묶이게 되었으니, 그 지역이 바로 안시성이었습니다.

배우 조인성 주연의 2018년 개봉 영화 안시성을 보면 당시 당나라 군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가 잘 묘사되어 있죠. 야사에는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이 쏜 화살이 당태종의 눈에 박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올 정도입니다.

어찌됐건 요동반도의 미친 듯한 추위 속에서 당나라는 군대를 물리게 됩니다. 이후에도 당나라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공하려 준비했는데요. 서기 649년, 51세의 나이로 당태종이 갑자기 죽게 됩니다.

물론, 나중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다시 침공해서 서기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긴 하죠. 당나라가 신라와 손을 잡고 나당 연합군을 만들어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야기는 우리 역사의 주요 사건 중 하나라는 거, 다들 아시죠?

중국 최초의 여황제 – 측전무후

당태종 이세민이 죽자, 그의 아들 이치가 황제에 즉위하고 당고종이 됩니다. 당고종에게는 왕씨 황후와 후궁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있던 소씨 숙비가 있었는데요. 왕황후가 소식비란 후궁을 질투하다, 한 여인을 궁에 불러 정식 후궁으로 만듭니다. 그 여인이 바로 당고종이 몰래 마음에 들어하던 아버지 당태종의 후궁 무조였죠.

궁에 들어오는 무조는 황제에게 없는 사건을 만들고 모함하여 소숙비와 왕황후 둘 다를 내쫒습니다. 그리고 서기 655년 황제의 정식 부인인 황후가 됩니다.

그리고 권력에 욕심을 내던 사람 답게,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임명시켜 버립니다. 나중에는 권력욕에 눈이 멀었다고 비판하는 태자를 몰래 독살하기까지 할 정도로 권력에 눈이 먼 여자였죠. 항명하는 둘째 태자는 멀리 유배 보내고, 셋째 아들을 태자 자리에 앉히는데요. 결국 여차저차해서 셋짜 애들도 황제 자리에서 끌어 내립니다.

네 번째 아들을 황제 자리에 올렸다가, 결국 물려받는 형식으로 본인이 황제 자리에 올라버려요. 서기 690년, 그녀 나이 67세,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황제가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당나라에서 주(周)나라로 바꿔버립니다. 네, 당나라가 망해버린 거죠.

측전무후가 더 나이를 먹고 병이 크게 나서 자리에 눕게 되는데요. 이때 불만을 가지고 있던 세력들이 전임 황제 당중종(셋째 아들)을 찾아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합니다. 결국 쿠데타에 의해 측전무후는 다시 황제자리에서 쫒겨나구요. 황제가 된 중종은 나라 이름을 주나라에서 다시 당나라로 되돌려놓죠.

참고로 측전무후는 무슨 뜻일까요? 측전은 시호, 즉, 왕, 왕비, 황제, 황후 등이 죽은 후 받는 이름이구요. 무후는 무씨 성을 가진 황후란 뜻입니다. 즉 중국 역사는 측전무후를 황제로 기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현종, 양귀비, 안록산의 난

당예종의 아들이 바로 당현종입니다. 웃기지만, 당현종은 자기 할머니 측전무후가 정치적 방해세력을 모조리 척결한 까닭에, 마음 편히 정치를 할 수 있었죠. 막강한 군사력으로 당나라의 영토도 확장시키고,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답니다.

그런데 당현종이 후에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됩니다. 간언하는 신하들이 없자 사치도 부리는데, 자기의 황후가 죽자 그만 정신줄을 놔버리지요. 자기의 18번 째 며느리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습니다. 그 여인이 바로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인 양귀비입니다.

궁에 들어간 양귀비는 자신의 일가친척들을 요직에 앉히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데요. 이 와중에 간신들이 들끓게 되었겠죠? 이 중 안록산이라고, 페르시아(이란)에서 귀화한 장수가 있었습니다. 또 양국충이라는 재상도 있었죠.

둘이 권력을 두고 탐하다, 결국 안록산이 서기 755년 간신 양국충을 제거한답씨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게 안록산의 난입니다. 반란군이 수도 앞까지 들이닥치자, 현종과 양귀비는 궁을 탈출해서 도주하기 시작합니다.

양귀비를 사랑했던 당현종은 도주하다, 사람을 시켜 양국충의 목을 베어버리고, 양귀비는 목 졸라 죽입니다. 그리고 같이 도주하던 자신의 아들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준 후, 본인은 계속 도망을 갑니다.

이 황제가 당나라 숙종입니다. 숙종은 안록산에게 반대하는 지방 세력들과 손을 잡고 반격에 나서구요. 어쩌이찌 반란을 겨우 진압합니다.

그런데 이미 중앙권력이 무너진 상황이라, 반란 진압에 도움을 주었던 지방 군사 실권자(절도사)들이 판을 치는 지방 분권 시대가 도래하게 되죠.

황소의 난, 주전충, 당나라의 멸망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려고 돈을 많이 쓴 당나라 조정은 돈 나올 구멍을 만들기 위해 소금을 전매합니다. 국가에서만 소금을 독점 생산, 판매할 수 있게 한 거죠. 그러다 보니 정부 몰래 소금을 만들어 정부보다 소금을 싸게 파는 밀매업자들이 등장하게 됐구요.

황소라는 사람이 소금 밀매업자 중 가장 큰 돈을 벌고 있던 사람이었는데요. 과거에서 낙방한 황소는 소금 밀매업을 통해 큰 돈을 벌었지만, 중국 정부의 단속 앞에서 위험에 처하게 되자 결국 반란을 일으킵니다.

당나라는 당시 무정부에 가까웠던 터라, 황소를 따르던 반란군은 거의 60만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당나라 황제 희종이 궁을 버리고 도망가버리자 무혈입성하게 된 황소. 새 나라 이름을 대제라고 정해버리는데요.

결국 전열을 다시 정비한 당나라 군대가 다시 재정비를 하고 수도탈환작전에 들어가자, 황소는 계속 밀리다가 서기 884년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사실 황소는 자신의 오른팔이던 주온이란 인물이 배신을 때리고, 안에서 내분을 일으켜 패하게 된 건데요. 당나라 황실은 주온에게 앞으로 충성해라는 뜻에서 전충이란 이름을 내립니다. 이 사람이 바로 주전충입니다.

결국 이 주전충이 당나라 황제 소종을 협박해서 강제로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소종의 아들 중 한 명을 바지 황제로 만듭니다. 그 황제가 당나라 마지막 황제인 애종입니다. 주전충은 애종 마저 끌어내리고, 서기 907년 본인이 황제가 되죠. 당나라가 건국 290년 만에 역사 속에서 사라진 순간이었습니다.

서기 907년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 황족, 고위 관료들을 모조리 몰살시킵니다. 이런 엽기적인 짓을 벌인 후 새로 나라를 세우죠. 그게 양(梁)나라입니다.

중국 남북조 때 오, 동진, 송, 제, 양, 진 이렇게 6개 나라가 있었는데, 이 중 양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주전충이 세운 양나라를 뒤에 세워진 양나라라 하여 후량이라 부릅니다. 주전충은 후량의 초대 황제가 되는 거죠.

당나라가 멸망할 때 주전충을 따라, 여러 세력들이 자신들도 나라를 세운답시고 여기저기 나서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중국 북부 지역에 총 5개 왕조가 생겼다가 역사 속에 사라집니다.이 5개 왕조를 오대라고 합니다.

중국 남부에서는 10개의 조그만 지방 정권들이 생겨납니다. 이 혼란의 시기를 5대10국 시대라고 부르는 거구요.

주전층이 당나라를 멸망시킨 구백칠년부터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 979년까지 약 70년에 걸쳐 여러 나라가 흥망한 시대였습니다. 중국사를 공부할 때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재미없는 시기이기도 하죠.

5대10국의 시대는 중원의 5개 왕조 가운데 마지막 왕조였던 후주라는 나라가 정리 후 막을 내립니다. 이 나라들이 싸울 때 중원의 나라들이 하면 안 되는 짓을 하나 했는데요. 그게 바로 북방 유목 민족이었던 거란족에게 만리장성 남쪽의 땅을 뚝 떼어준 거였죠.

거란은 중원에 들어온 후, 중국 한족 나라들처럼 나라 이름을 요(遼)로 바꿉니다. 문제는 이 요나라가 후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거죠.

후주 멸망

후주와 요나라가 한판 붙을 때 조광윤이라는 사람이 사령관에 임명이 되는데, 그가 바로 후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세우는 인물입니다.

후주의 황제는 7살 짜리 어린애였다보니, 군부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 황제가 되면 좋겠다는 식으로 조광윤에게 쿠데타를 제안합니다. 이를 거절한 조광윤이 취했을 때 그의 부하들이 몰래 황제의 옷을 입혀버립니다. 황제의 옷을 입으면 사형에 처해지다 보니, 부하들이 쿠데타를 하기 위해 물을 엎질러 버린 거죠.

군대를 돌려 수도로 향하는 조광윤. 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싱크로율이 100%죠? 조광윤은 후주의 황제와 황족들, 신하들을 죽이지 않고 잘 대우해줍니다. 그리고 평화롭게 정권을 이양받고, 서기 960년 나라 이름을 송나라로 바꾸죠.

조광윤은 5대10국의 난장판을 정리한 후, 군 실권자들에게 큰 재산을 나누어주고 전역을 시킵니다. 이런 문민 정부화 과정을 통해 송나라를 빠르게 안정시켜나가죠.

요, 대하, 금의 송나라 침략

이 시기, 북방에서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는 빠르게 군사 강국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서기 1004년, 요나라는 20만의 대군으로 송나라 정벌을 시도하죠. 송나라가 요나라의 침략을 잘 막아냈다 보니, 요나라는 송나라에 휴전 협상을 제안합니다.

근데 당시 엄청난 졸보였던 송나라 황제 진종이 겁을 먹고, 요나라의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송나라를 괴롭힌 건 요나라 뿐만 아니었습니다. 1038년 송나라 서쪽의 대하라는 또 다른 북방 유목 민족 국가도 송나라를 치고 들어옵니다. 송나라는 또 겁을 집어먹고 대하의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응하죠.

1115년엔 만주 땅에 등장한 또 다른 유목 민족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는데요. 금나라는 군사 강국이라, 요나라를 공격하자마자 거의 요나라를 무너트릴 뻔합니다. 이걸 지켜본 송나라가 금나라에 제안해서, 함께 요나라를 멸망시키기로 해요. 이게 서기 1120년의 일입니다.

금나라는 남쪽의 요나라를 공격하는데, 하필 이때 송나라에서는 반란이 일어납니다. 금나라는 결국 혼자 군사를 보내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켜요.

수호지, 양산박 송강의 반란

금나라가 요나라를 공격할 때, 송나라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말씀드렸는데요. 당시 송나라의 황제는 휘종이었습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예술에만 미쳐있던 황제입니다. 특히 돌을 사랑해서, 아름다운 돌이 발견되면 얼마나 무겁든 수도까지 배달되도록 했는데요. 나라가 개판이 되다 보니, 산동지방 양산박에서 송강이란 인물이 반란을 일으키죠.

네 이 이야기가 바로 수호지입니다.

송나라도 국내 반란을 겨우 진압하고 숟가락만 얻는 형국으로 금나라에 합세를 하긴 했습니다. 금나라가 쿨하게 원래 계약대로 요나라를 송나라에게 나누어주죠.

근데 자신들의 군사력이 강하다고 착각한 송나라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는지 이번에는 금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망한 요나라의 잔존 세력들과 힘을 합쳐 금나라를 공격하자 제안하죠.

이걸 알게 된 금나라는 당연히 송나라에 쳐들어갑니다.

송나라의 멸망, 곽경의 육갑신병

예술에 미쳐있던 휘종은 금나라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곤 자기 아들을 황제에 앉힌 후 빠르게 남쪽으로 도망갑니다. 휘종의 아들 흠종도 수도를 탈출하려 하죠. 성난 백성들이 흠종을 막아세우고, 금나라의 침략도 겨우겨우 막아냅니다. 의외의 저항에 놀란 금나라는 송나라와 협상을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세우는데, 문제는 송나라가 또 그 조건을 어이없이 받아들였다는데 있죠.

평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중원 정벌을 목표로 하고 있던 금나라가 다시 송나라를 공격했거든요. 이때 곽경이란 사기꾼이 등장합니다. 당시 곽경이 육갑법(六甲法)에 정통한 인물로 소문이 나 있었다는데, 쉽게 말하면 웃기게도 사주가 좋은 사람 7777명을 뽑아 육갑신병이라 이름 붙이고, 길일을 택해 전투를 치렀다는 거죠.

군사훈련이 하나도 되어 있지 않은 것도 문제였는데, 멍청하게도 금나라 군이 수도 앞까지 왔을 때 곽경은 실제로 전투에서 이길거라 믿고 수도 성문을 활짝 열어버립니다. 흰옷을 입은 7777명의 병사들이 기도하는 모습에 놀랐을 수 있겠지만, 결국 미친놈들이라는 걸 깨달은 금나라는 무혈입성하게 됩니다.

서기 1127년, 송나라 황제 휘종과 많은 황족, 고위관리들은 모두 금나라로 끌려가고, 만주 벌판의 추위 속에서 불쌍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남송시대, 명장 악비

수도가 함락되고 형인 휘종 등이 금나라로 끌려간 걸 알게 된 동생은 남쪽으로 도주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항저우를 수도로 정하고 송나라를 이어가죠. 그게 남쪽에 있는 송나라, 즉 남송입니다. 금나라 군들은 남쪽까지 쳐들어갔지만, 남송에서 잘 반격을 해서 다시 북쪽으로 돌아갔다고 하네요.

남송에서 금나라 여진족들을 한 번 물리친 상황에서, 신하들 사이에서 두 가지 주장이 오고갑니다. 금나라와 맞서 끝까지 싸우자는 파와, 금나라와 이제는 타협하자는 파였죠.

금나라와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던 사람이 바로 중국의 명장으로 꼽히는 악비구요. 금나라와 평화를 주장한 사람은 진회입니다. 남송의 겁많은 황제 고종은 싸우기 싫다고 진회 편을 들었죠.

악비는 금나라군이 남쪽으로 치고 들어온다는 소식에 군대를 끌고 올라가 금나라군을 계속 격파합니다. 악비의 목표는 잃어버린 송나라의 북부 중원을 되찾자는 거였어요. 악비군은 결국 송나라의 수도였던 카이펑을 거의 수복하기 직전까지 갑니다.

남송 황제 고종과 협상파였던 진회는 악비의 활약에 질투를 느낍니다. 그리고 황제는 악비를 수도로 호출한 후, 반역죄를 씌워 악비를 죽이죠.

지금도 중국 항저우에 있는 악비 사당에 가면, 악비의 친필인 환아하산(還我河山)이란 글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나에게 우리의 산하를 돌려달라는 악비의 절규죠. 오른쪽 사진은 악비 사당 앞에 있는 매국노 진회의 동상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그 동상을 지날 때마다 욕을 하며 침을 뱉는다고 하네요.

악비가 죽자 고종은 금나라의 말도 안 되는 조건에 응합니다. 많은 돈을 바치는 것은 기본이고, 금나라의 신하가 된다는 내용이었죠. 그리곤 금나라가 다시는 침략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답니다.

금나라가 남송을 괴롭히고 있을 때 금나라 북쪽 초원지대에서 힘을 기르고 있던 유목 민족이 있었습니다. 바로 몽골족이었죠. 1162년(?) 몽골 초원에서 태어난 ‘테무친’이라는 인물이 몽골의 여러 부족을 하나로 뭉쳐 1204년 통일 몽골제국을 세웁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칭기스칸이라 개명하죠.

세계 최대의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

금나라는 북쪽 몽골의 여러 부족들이 나중에 힘을 합치는 걸 견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성장 가능성이 있는 몽골 부족들을 견제하고 분열시켜왔습니다. 몽골족이 통일국가를 만든 후, 철천지원수였던 금나라를 공격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죠.

1211년 몽골은 금나라를 공격하여 금나라의 수도 중도(베이징)를 완전 포위합니다. 금나라 황제가 딸과 부인을 바쳐 겨울 전쟁을 물린 후 카이펑으로 도망을 갔는데요. 몽골은 금나라가 수도를 옮긴 걸 두고 자기들과 끝까지 항전하려 한다며 수도 카이펑까지 치고 들어가려 합니다.

이때 몽골은 서쪽 중앙아시아의 호라즘이라는 이슬람 왕조국가에 외교사절을 보냈는데, 호라즘에서 사신들을 다 죽여버리자 몽골은 금나라가 아닌 중앙아시아 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칭기즈칸은 호라즘을 벙벌한 후, 러시아부근까지 침공해 들어갑니다. 이게 몽골의 유럽 정벌의 시작이었죠.

칭기즈칸은 중국 옆에 탕구르트족이 세운 대하란 나라를 공격하다가 1277년 66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오고타이가 금나라 정벌에 돌입하죠. 결국 금나라는 서기 1234년 멸망합니다.

쿠빌라이칸

그리고 몽골은 다음 타깃으로 남송 정벌에 나섭니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사령관이었는데요. 한창 남송 공격을 하던 중 1259년 남송 공격을 중단하고 몽골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쿠빌라이의 형이 급사를 하자, 쿠빌라이의 동생이 갑자기 ‘내가 최고 지도자 할래!’ 이러면서 칸의 자리에 오르거든요.

본국으로 돌아간 쿠빌라이는 동생과 권력 다툼 끝에 몽골 최고 지도자 칸이 됩니다.

원나라 초대 황제 쿠빌라이칸

고려는 이 권력 다툼에서 동생이 아닌 쿠빌라이 칸의 편에 섰구요. 그래서 쿠빌라이가 고려를 침략하지 않고, 몽골 공주들을 고려왕에게 시집 보내며 대우를 해준 거랍니다.

쿠빌라이는 유목 민족으로 살아가기 보다, 중원의 주인이 되자는 생각으로 수도를 몽골 초원 한가운데서 지금의 베이징으로 옮겨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남쪽의 남송 정벌에 돌입하죠. 그렇게 서기 1279년 남송을 포함한 송나라가 멸망하고, 유목 민족이 중국 대륙 전체를 장악하게 됩니다.

참고로 ‘몽고(蒙古)’는 몽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중국 한족이 몽골을 얕잡아 보기 위해, 한자식 이름으로 무지몽매하고 고루하다는 뜻을 담아 몽골을 몽고라고 표기했다 하네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는 늘 ‘어떻게 하면 중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당시 중국 한족은 1억명이 넘었는데, 몽골족은 겨우 100만명에 불과했거든요.

게다가 칭기즈칸이 정복한 엄청난 땅덩어리들(중앙아시아에서 거의 러시아까지)은 쿠빌라이가 동생들과 권력다툼을 하는 와중 분열되어 여러 개의 칸국으로 독립하게 됩니다. 킵차크 칸국 등이 원나라에서 떨어져 나간 몽골족 독립국입니다.

몽골족은 대부분 문맹이었다 보니, 쿠빌라이는 먼저 과거제도를 없앱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해 아랍에서 공무원들을 수입해오죠. 이미 자신들이 정복하고 통치하던 중동의 아랍권 사람들을 중국 본토로도 불러들인 겁니다.

사진은 후이족 무슬림들

참고로 원나라 관리들은 중동 출신 상인들을 눈이 다른 사람들이라 하여, 색목인(色目人)이라 불렀다 하네요. 색목인이 참고로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한족화되어 중국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인 후이족들의 조상이랍니다.

당시 중동인뿐 아니라 많은 유럽인도 원나라로 몰려왔습니다. 그 중엔 <동방견문록>을 쓴 이탈리아인 마르코폴로도 포함되어 있었죠. 마르코폴로가 무려 27년 동안 원나라를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걸 쓴 게 <동방견문록>입니다.

[왼쪽] 27년간 동방을 여행한 마르코폴로 [오른쪽]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동방견문록>

원나라 계급제도, 역참제도

원나라의 과거제도 폐지, 외국인 수입, 한족 차별 등으로 인해 원나라에는 4개의 계급이 생겨납니다. 몽골족, 색목인, 북부지역 한족, 그리고 구 남송인 순서로 높은 계급과 낮은 계급이 나뉘었어요. 구 남송인은 몽골에 끝까지 저항했다는 죄목으로 거의 노예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원나라는 전 세계와 연결된 고속도로 덕분에 크게 발전을 했습니다. 몽골족들이 말을 타고 다니며 전세계를 정복했다 보니, 광대한 땅덩어리 곳곳에 ‘역참’을 세웠거든요.

전 세계인들이 수시로 몽골족을 드나들며 무역 행위가 이루어지다 보니, 당연히 경제가 크게 발전할 수 밖에 없었겠죠?

그러나 원나라는 100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왕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게 아니라, 지도자가 죽으면 여러 부족장 회의가 열러 토론 끝에 지도자를 선출했거든요.

그런데 중국식 왕위 제도가 겹쳐 들어오면서 혼란이 왔고, 이 때문에 형이 동생을 죽이고, 동생이 형을 죽이고, 어머니가 아들을 배신하는 등 권력 투쟁이 개판으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1308년부터 1333년까지 25년 동안 8명의 황제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홍건적의 난, 주원장

원나라 멸망의 결정적 계기는 한족 차별이었습니다. 억압받는 한족의 수는 1억명인데, 이를 억압하는 몽골족의 수는 겨우 100만이다 보니 한족들이 속으로 부글부글 끓으며 기회만 엿보고 있었겠죠? 이때 유럽 인구의 1/3을 빼앗아간 흑사병이 중국 대륙에도 전파됩니다.

게다가 원나라 말기에 북쪽 황하에서 계속 홍수가 나러, 수나라 양제가 만든 그 대운하가 막혀버려요. 국내의 고속도로가 막힌 거였죠. 원나라는 한족을 동원해 운하를 다시 뚫으려 했는데, 한족들은 흑사병으로 죽어나가지, 토목공사에 시달리지, 결국 1351년 이 불만이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른 한족 농민들의 반란(홍건적의 난)으로 불거지게 됩니다.

명나라 초대 황제 주원장

한족 반란군의 목표는 원나라가 멸망시킨 송나라의 부활이었습니다. 홍건적의 난을 이끈 지도자가 바로 원나를 멸망시키고 한족의 나라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입니다.

주원장의 본명은 주중팔로 1328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는데, 스님으로 지내기도 힘들었다 보니 나도 힘들고 사람들도 굶어 죽는 건 다 원나라 때문이다, 라는 생각으로 홍건적에 합류합니다. 그때 나이 25세였습니다.

그는 원나라를 없애는 인재라는 뜻으로 주원장(朱元璋)이라 개명하고, 후에는 홍건적 세력에서 나와 자기만의 독자적인 혁명군을 만듭니다. 중국 남부에 살던 옛 남송 출신 한족들을 흡수하여, 중국 납무의 거점 도시 남경을 2만 대군으로 점령해버립니다.

중국은 남쪽의 주원장, 북쪽의 원나라로 대치 구도가 된 거죠. 중국 북부의 홍건적은 원나라군에 의해 괴멸을 당했는데요. 원나라군에 밀려 홍건적이 도주한 곳이 바로 우리의 고려였습니다. 고려 수도 개경은 홍건적에게 점령까지 당했는데, 이를 다 깨부수고 다시 탈환한 사람이 바로 조선을 건국한, 당시 고려의 장수 이성계였죠.

1368년 남부의 거점 도시 남경에서 주원장은 나라 이름을 명나라로 짓고 새 나라 건국을 선포합니다. 주원장의 무서운 기세에 원나라 마지막 황제는 베이징의 궁을 버리고 도망가다 객사하구요. 그의 아들인 황태자도 북쪽으로 도주해 옛 자기들 초원지대에 나라를 세우니, 이게 바로 북쪽의 원나라 북원이 되겠습니다. (이 북원은 중국 역사학자들이 자기들의 역사에 끼워주지 않고 있어요.)

몽골족이 버리고 간 베이징을 주원장이 접수하면서 거의 100년만에 중국 대륙은 다시 한족의 땅이 됩니다. 서기 1368년의 일입니다.

주원장은 자기 큰 아들을 태자로 임명한 후, 집권에 방해가 될 만한 인물을 모조리 죽입니다. 큰 아들이 갑자기 덜컥 죽은 후에는 자신의 손자 주윤문을 후계자로 임명 후, 역시 집권에 방해가 될 만한 인물들을 모두 죽이기 시작하죠. 그렇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숫자가 1만 5,00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주원장은 서기 1398년 그의 나이 71살에 죽고, 손자 주윤문이 명나라 2대 황제 건문제로 즉위합니다. 문제는 주원장에게 26명의 아들이 있었다는 거죠. 주원장의 아들들이 여러 지방에 내려가서 도지사 비슷한 걸 하고 있었는데요. 어린 새 황제는 삼촌들이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보니, 삼촌들을 하나 둘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이 중 명나라 연경(지금의 베이징)을 관할하던 주체라는 삼촌이 이걸 알아채고, 1399년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수도 남경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주원장이 개국공신들을 포함하여 너무 많은 실력있는 신하들과 장수들을 이미 죽여버린 까닭에, 건문제를 지킬 사람들이 남아있지 않았죠. 결국 수도 남경은 주체에 의해 함락되고, 주체는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로 황제 자리에 오릅니다. 서기 1402년의 일입니다.

베이징 천도, 자금성 완공

영락제는 조카를 없애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보니 전통성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명나라 최고의 학자 방효유에게 자신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글을 써달라고 하는데요. 방효유는 영락제를 두고 도적이라는 글을 써서 영락제를 화나게 만들죠. 결국 영락제는 방효유의 구족을 멸합니다.

방효유에게 비난을 당한 영락제는 조카가 다스리던 현재의 수도 남경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연경을 새 수도로 정하고 이사를 가죠. 수도 이름을 연경에서 북경, 즉 베이징으로 바꾼 게 영락제입니다.

그리고 영락제는 수도 한복판에 가장 크고 웅대한 궁전을 지었으니, 그게 바로 지금의 자금성입니다.

정화의 남해대항해

영락제는 전통성을 높이기 위해, 수도를 옮기고 화려한 궁궐을 지었습니다. 나아가 해외에서도 전통성을 인정받고자, 큰 함대를 만들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황제의 위엄을 보이기로 하죠. 영락제는 정화란 인물을 함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 대원정을 보냅니다. 기록에 따르면 260척의 배에 거의 3만명이 탔다고 하네요.

배 한 척의 크기가 8,000톤 급이었다고 하는데, 동시대 유럽의 범선이 겨우 120톤 급이었던 것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물론 중국식 과장이 들어갔겠죠?

정화의 함대는 명나라를 출발해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반도를 지나 지금의 아프리카 케냐까지 갔다고 하네요. 중국인들은 정화의 함대가 미국에도 갔고, 신대륙을 발견한 것도 콜럼버스가 아니라 중국이라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물론, 인도 밑에 있는 스리랑카는 명라나에 굴복할 수 없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화는 바로 상륙해 왕궁을 박살내고 왕을 잡아 굴복을 받아냈구요.

유럽이 대항해시대를 시작해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한 게 1492년이었습니다. 중국은 100년 전에 전 세계를 항해하고 다녔는데도 세계 제패를 하지 못했죠. 그 이유가 뭘까요?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 건설이 목적이었지만, 중국은 그냥 과시용 순회를 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토목의 변, 만리장성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만들었지만, 지금의 중국에 여행가면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은 전부 명나라 때 건설한 거라 합니다. 명나라가 자리잡아가던 1400년대 초반, 북쪽에서 몽골족이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는데요. 그 전까지는 몽골족에 공물을 바치며 조용히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1449년 명나라의 정통제가 더 이상 공물을 낼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몽골족은 당연히 명나라로 쳐들어왔구요.

이때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가 전투 중 포로로 잡힙니다. 베이징 바로 위 토목이란 곳에서 포로로 잡히는데, 나중에야 풀려나지만 중국 한족은 이 때를 아주 치욕적인 역사로 서술한답니다. 이 사건을 토목의 변이라고 부르는데요.

이후 명나라는 북쪽 유목민족들과는 상종을 하면 안 된다는 각오로, 열심히 만리장성을 쌓게 된 거죠.

임진왜란, 누르하치, 후금

조선에서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습니다. 이게 조선에도 큰 타격을 주었지만, 결과적으로 명나라의 멸망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당시 명나라 황제는 만력제였는데요.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됐는데, 장거정이라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학자 밑에서 수업을 받습니다.

장거정은 늘 황제에게 근검절약을 강조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장거정이 부정축재를 어마어마하게 했다네요. 이를 안 황제는 크게 실망하여, 일부러 30년 동안 국가 통치를 내버려두고 청개구리 생활을 합니다. 거의 30년간 신하들을 보지도 않고 파업을 했다네요.

이런 만력제가 딱 한 번 황제 노릇을 한 적이 있었으니, 그게 7년 동안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만력제가 조선에 무리해서 파병을 했거든요. 조선에서는 명나라가 생명의 은인이다 보니, 충북 괴산에 있는 만동묘라는 사당을 짓고 만력제를 위해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임진왜란이 끝나고 약 50년 후 명나라는 멸망합니다. 조선과 명나라가 일본과 싸우는데 골몰하는 동안, 만주 벌판에서 강한 유목 민족 국가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들은 칭기즈칸을 미워했습니다. 여진족들은 이전에 말갈족이라 불렸는데요. 명나라 때는 만주족이라 불립니다. 아무튼 금나라가 칭기즈칸에 의해 박살난 후 여러개의 여진족들은 부족들로 쪼개져 살고 있었어요.

후금의 초대 황제 누르하치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명나라가 조선의 전쟁에 신경쓰는 틈을 타, 누르하치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1616년 흩어져있던 만주족을 통일합니다. 그리고 나라를 세웠으니, 그게 바로 후금이죠.

사르후 전투, 홍타이지, 병자호란, 이자성의 난

누르하치는 후금 건국 후 명나라 땅을 조금씩 침공해나갑니다. 중국 만주 벌판에 있는 살이호(중국식 발음 사르후)라는 곳에서 빅매치가 벌어지는데요.

조선의 왕이었던 광해군이 명나라를 지원해준다는 명목으로 강홍립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1만 5,000명을 파병해 참전시킨 전투가 여기에서 벌어집니다. 이게 사르후 전투입니다.

1619년 일어난 이 전투에서 명나라군은 박살이 납니다. 명나라 주력부대를 대패시킨 후금은 이 기세를 밀고 나가 요동반도 전체를 장악합니다. 누르하치는 중원에 들어가려 했건만, 만리장성을 넘지 못하고 1626년 67살로 사망하고 맙니다.

누르하치의 아들인 홍타이지가 후금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후, 옆동네 유목 민족인 몽골족을 하나하나 각개격파해나가죠. 그리고 나라 이름을 중국식 한 글자인 청나라로 바꿉니다.

병자호란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이후 스스로를 칸이 아닌 황제로 칭하니, 이때가 1636년이었습니다.

홍타이지는 명나라를 치기 전에, 자기들 뒤에 있는 조선을 굴복시키고자 했습니다. 네, 이 홍타이지가 1636년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꾼 그해, 병자호란을 일으킨 바로 그 인물입니다. 인조를 남한산성에서 끄집어내어 굴복시킨 황제죠.

명나라는 만주족의 침략에 무너져가고 있었는데요. 엎친데 겹친격으로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납니다. 이 중 반란군 중 가장 힘이 강한 인물이 바로 이자성이었죠. 청나라가 명나라에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하는 틈을 타, 이자성의 군대는 명나라의 여러 도시들을 점령하며 수도 베이징으로 나아갑니다.

1644년 이자성의 농민군이 베이징 외곽까지 들어오자, 자금성에 있던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결을 합니다.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점령당한 게 아니라, 황제가 목을 메 자결함으로써 셀프 멸망하게 된 거죠.

순치제, 오삼계, 명나라 멸망

명나라는 실질적으로 망했지만, 청나라군은 아직 만리장성의 관문인 산해관을 넘지 못했습니다. 홍타이지 역시 갑자기 병에 걸려 죽거든요.

그 다음 청나라 황제가 되는 이는 홍타이지의 아들인 순치제입니다. 황제로 즉위했을 때 나이가 5살이라, 홍타이지의 동생인 도르곤이 대신 나라를 통치해주던 상황이었답니다. 도르곤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도망간 인조의 아들 봉림대군을 강화도까지 바다 건너 쳐들어가 육지로 끌고 나온 인물이기도 합니다.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의 이름은 오삼계입니다.

오삼계에게는 진원원이란 애첩이 있었는데, 이자성의 반란군이 베이징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진원원이 이자성군의 한 장수에게 겁탈당하는 일이 발생하죠. 도르곤은 격분한 오삼계에게 산해관의 문을 열어주면 청나라군이 베이징에 가서 이자성 군을 박살내고 원한을 풀어주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오삼계는 순순히 산해관의 문을 열어주고, 청나라군은 바로 베이징으로 진격 해 이자성의 군대를 토벌합니다.

송나라가 남쪽으로 도망가 남송을 세워 끝까지 저항했듯이, 명나라 역시 숭정제의 사촌 역시 남쪽으로 도주해 남명을 세웁니다. 사촌들끼리 권력다툼을 벌이던 중, 남명의 마지막 황제 주유랑은 남쪽까지 쫒아온 청나라군에 놀라 미얀마까지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남쪽까지 쳐들어간 청나라군 장수가 오삼계였다고 하네요. 청나라는 오삼계를 중국 남부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했던 거였습니다. 오삼계는 미얀마까지 도망간 남명의 마지막 황제 주유랑을 죽이고, 명나라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합니다. 1662년의 일입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1644년 베이징에 입성해서 자금성을 손에 넣습니다. 전 세계를 지배한 몽골족도 한족 차별 때문에 중국 대륙을 90여년 밖에 지배하지 못했는데요. 만주족은 이를 거울 삼아 최대한 한족을 끌어주는 식으로 정책을 펴죠.

몽골의 원나라는 한족이 공무원이 되는 걸 금지했는데, 청나라는 고위 공직자의 자리를 한족 50%, 만주족 50%로 공평하게 나눕니다. 그리고 한자를 그대로 쓰게 하는 한편, 만주어를 공영어로 도입하죠. 한족과 만주족의 화합을 상징하는 음식도 만듭니다. 만한전석이라는 요리인데요, 만주족 음식과 한족의 음식을 합친 요리들을 말합니다.

베이징 시내에 가면 만한전석 요리들을 파는 식당이 많다고 하네요.

당근이 있으면 채찍도 있었겠죠? 남쪽 지역의 왕으로 임명받은 오삼계는 독립국의 왕 행세를 하다가 1673년 반란을 일으킵니다. 결국 이 반란은 손쉽게 진압되지요. 만주족은 이후 한족에게 변발을 강제합니다. 그리고 한자로 만주족을 비난하면 바로 사형에 처했어요.

강희제, 대만, 정성공

청나라 황제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이렇게 3명만 기억하면 됩니다. 도르곤이 만리장성을 넘을 때 어린 황제가 홍타이지의 아들 순치제였는데요. 순치제는 삼촌 도르곤의 그늘에 가렸다가 24살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맙니다.

순치제의 아들이 바로 청나라 3대 황제인 강희제입니다. 강희제는 청나라를 무려 61년 동안 통치하며, 오늘날의 대만을 중국 영토로 만들었죠.

명나라가 망할 때 대만은 네덜란드 식민지였는데요. 만주족이 명나라를 멸망시킬 때 정성공이란 명나라 관리가, 청나라에 반기를 들며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청나라군에 밀려 중국 대륙을 포기하고, 2만의 한족 병사들과 함께 1661년 지금의 대만으로 들어갑니다.

중국 한족이 처음으로 동남아시아의 유럽 식민지 대만에 첫 발을 들인 순간이었죠. 강희제는 집요한 공격 끝에 1683년 대만의 정성공 일당을 소탕하고, 대만을 청나라 땅으로 만듭니다. 대만이 중국 땅이 된 게 바로 강희제 때부터죠.

역대 황제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강희제

강희제는 예수회 신부들과 소통하기 위해 라틴어도 공부하고, 하루에 4시간만 자며 한자, 중국어를 공부하는 등 한족과 소통을 이어갔습니다.

옹정제, 건륭제, 조지 매카트니

이런 강희제가 61년 동안 청나라를 통치하고, 대만도 중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보니, 그의 아들 옹정제는 존재감이 좀 떨어지는 편이긴 합니다. 옹정제는 워낙에 일을 꼼꼼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이나 공문서에 문제가 있으면 본인이 직접 지적질을 했다 하네요.

옹정제가 쓴 당시의 쪽지들이 모여 112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는데, 이게 지금 중국의 보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옹정제의 아들 건륭제는 무려 황제 자리에 60년이나 앉았던 인물입니다. 건륭제 때 유럽과의 무역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는데요. 중국 남부 특산물인 홍차가 영국에 본격적으로 판매되던 때가 이 때였죠.

홍차 판매대금으로 영국의 은이 청나라로 대량으로 넘어오고,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니 인구도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때 중국의 인구가 3억을 돌파했다네요.

건륭제는 본인의 옆에 화신이라는 똑똑한 인물을 관리로 두고 있었는데요. 나중에 이 화신을 국고담당자로 승진시킵니다. 근데 화신이 건륭제 몰래 나랏돈을 다 긁어모아 제 주머니에 넣고, 조폭을 키운 후 상인들을 등쳐먹기까지 했어요.

나이가 들어 총명함이 사라진 건륭제는 여러개의 감투를 화신에게 몰아주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수 많은 딸들 중 한 명과 결혼까지 시킵니다. 지금 중국인들은 화신을 간신배의 대명사로 여기는데요. 아무튼 화신 때문에 청나라 정권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840년, 후에 서술할 아편전쟁이 터진 거죠.

영국의 특사 조지 매카트니

영국에서는 대량의 은화를 주고 영국의 홍차를 구입해갔는데요. 무역불균형으로 자신들의 은화가 사라지는 게 못마땅해했던 영국은 1792년 조지 매카트니를 특사로 청나라에 보냅니다.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했는데, 이때 인사법 때문에 시비가 일어요. 청나라는 영국 특사에게 머리를 땅에 박는 만주족 인사를 요구했지만, 영국은 그럴 수 없다고 한 거죠.

영국의 홍콩 할양, 아편전쟁

매카트니는 건륭제를 만나, 영국 물건도 좀 많이 사주십쇼, 라며 읍소하는데요. 건륭제는 영국의 첨단 공산품들에 관심을 보이기는 커녕, 조합한 장난감이라며 영국의 여러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그냥 우리한테선 홍차만 사가라고 차갑게 덧붙이죠.

건륭제와 신경전을 벌인 조지 매카트니는 청나라를 떠나며 ‘청나라는 이미 썩은 배라, 곧 침몰하게 될 거다’라는 예언을 남깁니다.

영국은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인도에서 아편을 키워 중국에 밀매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중국의 하급 공무원의 경우 거의 90%가 아편에 중독될 정도로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죠. 청나라로 흘러간 은은 이렇게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광동지역의 아편을 피우고 있는 중국인들의 사진

이때 중국 황제는 도광제였는데요. 아편에 잠깐 중독된 적이 있었는데, 힘겹게 아편을 끊어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중국 사회 병폐의 온상이었던 아편을 대대적으로 단속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광저우 주재 서양 무역 대표들을 불러 앞으로 아편을 판매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영국 무역 대표와 영국 무역을 총괄하던 찰스 엘리엇 감독관은 거부를 하고, 결국 광저우에서 쫒겨나게 됩니다. 이들은 마카오를 거쳐 홍콩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 SOS를 보내는데요. 상황을 좀 파악하기 위해 영국에서는 군함 두 척을 홍콩 앞바다로 보냅니다.

일부 영국 상인들이 청나라와 거래하려는데, 영국 군함이 대영제국 국민으로서 자존심도 없냐며 이를 막아서죠. 청나라는 왜 자신들과의 무역에 군함이 딴지를 거냐며 수군을 출동시키고, 1839년 홍콩 앞바다에서 영국 군함과 청나라 수군 사이에 해전이 벌어집니다.

이때 놀랍게도 청나라 수군의 목선 29척이 영국 군함 2대에 의해 완전 격파됩니다. 함포 사거리가 문제였던 거죠.

영국의 철갑 네메시스호

영국은 청나라의 기를 꺾기 위해 군함을 베이징 코앞의 톈진항 앞바다까지 올려보냅니다. 그리고 1841년 1월 영국에서는 무적 철갑 네메시스 호를 광저우 앞바다에 보냅니다. 광저우는 불바다가 되고요. 경악한 청나라 조정은 영국과 협상하여 영국의 요구대로 홍콩을 넘깁니다. 이게 1841년 이루어진 광둥협정이죠.

그리고 홍콩은 다음 해인 1842년 난징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영국에 넘어갑니다.

사실 이후에도 서술해야 할 중국의 근현대사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난징조약, 태평천국의 난, 2차 아편전쟁, 양무운동, 중화민국의 국부 쑨원, 신해혁명, 위안스카이, 마오쩌둥, 그리고 중국을 통일한 장제스 등등.

하지만 명리학의 역사에 대해 정리하기 위해 중국사를 공부해보았으니,
근현대사와 관련된 부분은 제외하고 여기까지만 중국사를 서술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중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글을 써볼 수도 있겠네요.

중국 역사 연대표

지금까지 공부한 부분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역사 연대표를 만들어보았습니다.

위 연대표는 네이버 블로그 <스텝, 하루한장>의 제이 선생님께서 만드신 ‘중국 역사 연대표’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사전에 제이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원본을 참고하여 내용을 일부 수정 보완했음을 밝힙니다. 귀한 자료를 수정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제이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아래에 원안의 링크도 함께 올립니다.

다음에는 사주명리학의 역사에 대한 글로 찾아뵐게요.

오늘도 함께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초명 드림

<참고자료>

저서 『썬킴의 거침없는 세계사』, 2021, 썬킴 저, 지식의 숲
저서 『썬킴의 거침없는 중국사』, 2023, 썬킴 저, 지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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